http://chango.co.kr/past/recom/20000421/recom01.htm
뮤지션, 작곡가, 피아니스트, 영화 배우, 패션 모델, 현대 철학가에 이르기까지 그를 지칭하는 명칭들은 많다. 하지만 그 어떤 단어들로도 류이치 사카모토를 온전히 설명해낼 수는 없다. 우리에겐 세계적인 영화 음악가로 알려져 있는 류이치 사카모토가 4월 28일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내한 공연을 갖는다. 그의 역사적인 내한 공연에 즈음하여 그의 음악세계를 조명해본다.
Ryuichi Sakamoto 2000 누구보다 아름답게, 그러나 치열하게
류이치 사카모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의 사운드트랙이다. 그는 이 앨범으로 음악인의 꿈인 그래미와 오스카를 거머쥔 세계적인 아티스트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그 다음에 우리에게 류이치 사카모토는 가슴 시리도록 맑고 영롱한 피아노의 울림을 전해주는 음악가로 기억된다. 멀리 조지 윈스턴에서부터 앙드레 가뇽, 유키 쿠라모토 등의 뉴에이지 열풍에 힘입어 그의 근작 [BTTB]와 [Cinemage]는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한국에서의 푸대접에 화풀이라도 하듯 높은 판매고를 올리며 사카모토 열풍을 일으켰다. [BTTB]는 연주음반으로는 최초로 일본 오리콘 차트 1위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그의 정갈하고 청명한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류이치 사카모토는 단순히 비할리우드 출신으로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영화음악가만은 아니다. 가슴 시리게 스며드는 피아노 선율을 선사하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만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여러 이름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류이치 사카모토. 그의 이름과 음악을 아끼는 사람들은 YMO(Yellow Magic Orchestra)를 기억한다. 78년 하루오미 호소노, 유키히로 다카하시와 함께 결성한 YMO는 레이브와 테크노, 엠비언트 사운드로 일본 뿐 아니라 전세계에 그들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저팬 뉴웨이브의 선두주자 오시마 나기사 감독(국내에서 뒤늦게 개봉된 화제작 [감각의 제국]의 감독이기도 하다)의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를 통해 주목받는 영화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된 그는 [마지막 황제], [리틀 부다], [폭풍의 언덕], [스네이크 아이즈]에 이르기까지 영화음악의 백미라 일컬어지는 오리지널 스코어들을 만들어왔다. 99년 일본 최고의 흥행작이기도 한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의 [철도원]에서도 그만의 미니멀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92년 바르셀로나 하계 올림픽에서는 개막 서곡을 작곡하고 직접 오케스트라의 지휘까지 맡기도 했다. 배우로서, 모델로서도 완벽에 가까운 소화력으로 전방위 아티스트로 대접받는 그의 이력은 그러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행운은 아니었다.
그의 최고 출세작이기도 한 [마지막 황제]의 영화음악을 맡으면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음반 가게에 가서 중국음반을 한아름 가득 구입한 것이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베르톨루치 감독의 주문이기도 한 '매우 중국적이면서 서구적인, 또 고전적이면서 현대적인' 음악을 만들기 위해 그는 한 달 동안 중국 음악에 파묻혀 지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개막을 알리는 서곡 'El Mar Mediterrani'을 맡았을 때도 그는 지중해 연안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는 일에 가장 먼저 매달렸다. 주도면밀하고 철저한 작업 태도는 오늘날의 류이치 사카모토를 있게 한 가장 큰 원동력이다.
그의 예술가이자 현대 철학자로서의 면모는 97년작 [Discord]에서 엿볼 수 있다. 아프리카 기아 난민의 참혹한 현실에 대한 예술가적 고발문이자 참회록인 이 앨범은 그의 음악적 기본 사상이 인류애의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한국판 [에스콰이어] 98년 2월호 인터뷰에서 류이치 사카모토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음악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내 머릿속에는 나름대로 구상한 문화지도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서로 다른 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발견하게 되죠. 내 작품에 담겨 있는 수많은 음악은 서로 만나고 갈라지면서 커다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음악을 비롯한 여러 국지적 기반의 음악 또한 제 음악세계를 구성하는 한 요소라 생각합니다."
그는 인류애적 기반 위에 문화적 퓨전과 재결성을 몸소 실천하는 아티스트인 것이다.
정갈함, 그리고 실험 정신
음악가로서 류이치 사카모토의 작품 세계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정갈하고 단아한 분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실험 정신이다.
먼저 그의 영화 음악이나 일련의 피아노 연주곡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단아함은 그의 음악적 뿌리를 살펴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결론을 유추해낼 수 있다. 그에 관한 가장 널리 알려진 오해 중 하나는 그가 서양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동양권의 음악을 소개하는 역할을 해왔던 아티스트라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마지막 황제]의 음악이 널리 알려지면서 생겨나게 되었는데, 본인은 자신의 음악적 뿌리가 동양권에 있다는 지적들에 대해 분명하게 '노'라고 말하고 있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음악은 클래식, 재즈와 록 등 서양 음악의 귀를 통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일본이라는 동양에서 태어난 아티스트라는 이유로 오리엔털 뮤직의 소개자로 낙인찍히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음악적 특징이라 말할 수 있는 단아한 분위기의 명료한 멜로디 라인과 군더더기 없는 진행은 동서양 어느 한 쪽의 음악적 특색이라 명명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의 매끄러운 음악 전개는 영화 음악 등 일련의 작업을 통해 정제된 류이치 사카모토만의 스타일로, 대규모 오케스트레이션 위주의 기존 관행을 거부했던 그만의 독특한 음악적 아이덴티티의 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에게 아방가르드적 뮤지션이자 문화계의 퓨전 뱅가드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그만의 또다른 특징은 끊임없는 실험 정신이다. 그의 이러한 경향은 이미 YMO 시절 신디사이저를 이용한 다양한 음악적 실험에서부터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다양성은 그가 세계의 수많은 음악과의 교류에 적극적인 점에 힘입은 바 크다. 장르나 문화간의 벽을 파괴하는 그의 이런 작업은 그의 활동 무대를 단순히 음악에 국한시키지 않고 영상 작업의 병행, 아방가르드를 표방한 다양한 진보 운동에의 참여 등으로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BTTB
Cinemage
1996
The Last Emperor
(마지막 황제)
Merry Christmas
Mr..Lawrebce/
Furyo(메리 크리
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Sweet Revenge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계의 퓨전 메시아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 전반을 묶어 얘기하는 것은 다소 무리라 말할 수 있다. 그만큼 범위가 크고 넓은 음악을 들려주는 그이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 세계는 이곳 한국에서도, 그를 닮고자 하는 여러 Wannabe들에게 숭앙받는 동경의 경지이기도 하다.
이제 그의 앨범들을 통해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 세계에 빠져들어보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바다에 도전하기 전, 성공적인 유영을 위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변화'이다.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당신에게, '변화'라는 두 글자는 가장 도움이 되는 나침반이 될 것이다.
글 / 김지승 (cherry@changg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