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쯤 맑아지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아침 5시 50분.. 슬쩍 내다보니 여전히 하늘은 흐리고, 곧이어 빗소리까지 들립니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나오다가 잠깐 멈칫. 비도 오는데 짐만 무거워지지않을까 생각하다 결국 워크맨을 챙겨나왔고, stop-play 버튼을 눌러가며 테잎을 돌리고 있습니다. 워크맨 하나가 뭐 무겁냐고 하겠지만, 오늘은 쌕을 메고, 한 손엔 노트북 가방을 들고 나머지 손으로 큰 우산을 들어야했더니 휘청거리더라구요.
가끔 이렇게, 점심을 빨리 먹고 남은 시간을 이용해 음악을 들으며 주절주절 뭔가 쓰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아마 다 못 끝낼 게 틀림없지만.
그래서, 지금은.. 음, 'rain'으로 곡이 바뀌었군요. 류이치 사카모토의 영화음악 모음집 [1996]을 듣고 있습니다.
이 앨범은 제목 그대로, 그동안 그가 작곡했던 영화음악들을 간추려 모아 96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즉, '베스트 앨범'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인기있는 곡들을 무작정 짜집기로 실어놓은 베스트앨범과는 달리 재편성하여 연주한 곡들을 실어놓았다는데서 차별화될 수 있습니다.
원래 영화들의 사운드트랙에 실린 곡들을 하나하나 다 들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1996]에서는 '첼로, 바이올린, 피아노'라는 간결하면서도 풍성한 조합으로 연주하고 있는데, 이 치밀한 삼중주는 가끔은 여리고 우아하게, 가끔은 어떤 대형오케스트라보다도 힘차고 짜임새있게 한 곡 한 곡을 짚어나가는 느낌을 줍니다. 피아노는 그가 연주했다고 하네요. 어떤 곡은 원래는 오케스트라로 연주되기도 했고, 전자악기와 어우러졌던 곡도 있습니다. 클래시컬함과 일렉트로니컬함의 연결이 단순한 '접합'에 끝나지 않고 안정감있게 융합되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동경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탄탄한 기반에 한 발을 딛고, 또 한쪽은 다양한 지층을 더듬어가며 보폭을 넓혀갔으리라 짐작해봅니다.
데이빗 보위, 이기 팝 등과의 교류도 영향을 미쳤을 거란 얘기도 들어본 기억이 나네요. 아마 제가 처음 접한 그의 음악은, 한스 짐머와 함께 했던 <블랙 레인> 이었던 것 같습니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몇 달전에 우리나라를 방문, 각종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어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막식에선, 직접 자신의 곡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동양적인 감성을 토대로 하는 폭넓고 힘있는 표현력이,아마도 동,서양을 구분하지않아도 될만큼 설득력있게 다가가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자신만의 방 안에 숨어있는 감성을 끊임없이 성장시켜,수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교류할 수 있는 광장으로 만들어낼 줄 아는 이들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특히 그 <방법>이 음악이나 미술일 때.. 내게는 흐릿하고 산만하게만 느껴져 정체를 파악할 수 없던, 세상의 수많은 감각들이 그들만의 방안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져 나올 때..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듣고 있다보면, 자주 김수철을 떠올리곤 합니다.(옛날에 우리 동네에 살았어요, 중학교때 영어선생님 동생이었구요) '일곱빛깔 무지개'가 실린 <작은 거인> 시절의 판을 듣다가 <황천길>같은 판을 꺼내면, 이게 정말 한 사람이 만들어 낸 음악들일까 하는 감탄이 들곤 해요. 물론 중간에 '별리' 같은 곡도 있지만. 같은 판에 실린 '정녕 그대를'은 제가 왕청승 떨고싶을 때 틀어놓던 노래입니다. 으, 얘기가 영 엉뚱한 쪽으로.. '못다핀 꽃 한송이' '젊은 그대'를 부르던 작달막한 청년의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놀라울만큼 계속 자라고 깊어졌습니다. 대중음악에서 영화음악으로, 그리고 또 다른 영역으로. 그의 행로가 보여주는 탄력성과 끊임없는 탐험력, 그리고 집요한 근성. 만일 우리나라에서 류이치 사카모토 같은 사람을 들라면, 저는 김수철에게 기대를 걸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이번에 작업을 마친 <팔만대장경>역시 무척 궁금합니다. 이렇게 김수철을 생각하고 있으면, 이번엔 생각이 빠르게 역전해서 서태지에게 가지요^^ (태지야, 언제까지라도 기다릴테니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고(!) 새롭게 돌아오길) 음, 이러다 류이치 사카모토에 관한 수다는 영 끝이 안나겠군요. 사실 오래 종알거릴만큼 그의 음악에 대해 많이 알지못해서 자꾸 곁길로 빠진다는게 더 정확할 듯.
여하간, 김수철의 영화음악자료들도 관심있게 모아보고픈 생각이 듭니다만, 고작해야 녹음해서 들었던 <서편제> 테잎을 빼고는 <칠수와 만수> 사운드트랙 하나로는 뭐라고 쓸 말이 없겠네요. 전에 <두 여자의 집> 사운드트랙을 살까말까 망설이다 안 샀는데, 흑. 작년에 김수철 베스트 앨범 비슷한 게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베스트 앨범을 통한 선별적인 접선보다는, 가능하면 꾸역꾸역 소화가 안될만큼 왕창 다 들어보고 싶은 욕심은 어쩔 수 없네요.
...'rain'을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 앨범에 실린 'rain'과 'The last emperor'은 <마지막 황제>에서 뽑아낸 곡들이라 친숙합니다. 바이올린과 첼로의 강렬하고 섬세한 어울림이 잔잔하게 줄어들다 다시 되풀이되는 전개가 몹시 인상적이에요. 볼륨을 크게 높이고,눈 을 감고 곡이 흐르는대로 심장박동이 뛰게 내버려두는 것이 'rain'을 들을 때마다 써먹는 제 감상법입니다.
곧이어 나오는 'Bibo No Aozora'의 낮고 담담한 진행이 떨리는 마음을 조용히 쓰다듬어 주기 때문에 천천히 이완이 되거든요.
'1919'는 처음 들을 땐, 불편감을 느낄 정도로 낯설은 코드로 진행됩니다. 레닌의 목소리와 첼로가 합산된 흐름을 상상해보세요.
그리고, 'Merry Christmas Mr. Lawrence' 'The shelter-ing sky'와 'The Wuthering Heights'도 실려있구요.
'The sheltering sky'는 보진 못했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멜로물이었다는 얘기가 간간히 들리더군요. 음악은 참 애절하네요. 'The Wuthering Heights'도 역시 기대에 비해 무덤덤하게 봤던 기억이.. 줄리엣 비노쉬가 연기한 캐시는 소설을 읽으며 머리 속으로 그렸던 이미지에 비해 너무 약했고, 영화는 복잡미묘한 소설 전체를 일정 시간내에 따라잡기에 힘겨웠는지 와작와작 구겨서 쑤셔넣은 듯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겐 지루 했습니다. 참 썰렁한 극장이었다는 기억뿐, 이 음악은 어느 장면에서 나왔더라, 갸우뚱거릴만큼 영화에 대한 간단한 정보조차 회상이 잘 안되네요..
<마지막 황제>에 이어서 <리틀부다>까지 함께 했던 사카모토 - 베르톨루치 감독팀은 요즘은 어떻게 되가나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영화를 잘 표현해낼 줄 아는, 영화속의 감성을 더욱 풍성하게 흘러넘치도록 하는 파트너를 만나 함께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겠지요.
이 판에는 'A tribute to N.J.P'라는, 눈에 띄는 제목의 곡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N.J.P는 바로 백남준씨입니다. 사카모토는 백남준씨와 절친한 친구이자 작업도 같이 했다고 하구요, 특별히 그에게 헌정하는 곡을 만들어서 실었습니다. 괜히 흐뭇하네요 ^^ 그 외에도 영화 '하이힐'의 곡인가, 'High hills'도 있고.
..한 손바닥 위에 올라올만큼 작은 테잎- 그 속에 가득 담긴 작은 세계를 스크린 위으로 옮겨놓았을때..
그의 음악이 우아하고 윤기있게 춤추며, 빛과 어둠 사이를 균형감있게 조율해나갈 것을 상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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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ichi Sakamoto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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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곡/ 1. A Day a Gorilla Gives a Banana
2. Rain
3. Bibo No Aozora
4. The Last Emperor
5. 1919
6. Merry Christmas Mr. Lawrence
7. M.A.Y In The Backyard
8. The Sheltering Sky
9. A Tribute To N.J.P
10. High Heels
11. Anoneko No Torso
12. The Wuthering Heights
결국 집에 와서야 마무리하고 만, 지나치게 길어진 글을 보며..
>> elga